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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폐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 일기의 영화
기획연재

스폐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 일기의 영화

춘식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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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8일

혁명이나 혁신이라 하면 속도를 높이는 변화를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영화 세계에서는 느린 쪽이 혁명적이다. 전후 네오리얼리즘, 타르콥스키, 차이밍량, 샹탈 아케르만 등 상이한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영화가 느림의 미학을 예술적 무기로 삼는다는 사실이 일견 신기하기도 하지만, 전세계 주류 상업영화의 표준인 할리우드영화가 더 짧은 숏과 더 빠른 편집을 향해 질주해왔기에 이에 대한 안티테제들에서 공통점이 발견되는 현상은 자연스럽다. 빠른 시간이 처리되는 시간이라면 느린 시간은 체감되는 시간이고 배우는 시간이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과 미셸 윌리엄스의 <쇼잉 업>도 느릿하다. 현대 예술가의 삶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이렇다 할 낙차가 없는 이야기다. 포틀랜드의 세라믹 아티스트 리지(미셸 윌리엄스)는 미대 교직원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시간을 쪼개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다. 리지의 집주인인 성공한 설치미술가 조(홍차우)는 이따금 리지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 부상당한 비둘기를 돌봐야 하는 뜻밖의 사태까지 발목을 잡는다. 일상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것들을 그러모아 안고 리지는 참을성 있게 테이블에 앉아 심플한 동작으로 물질의 상태를 바꿔나간다. 흙을 빚고 구워 아름다운 사물을 짓는다. 전시회 개막날 그동안 리지에게 스트레스를 준 친구와 가족을 포함해 작은 갤러리에 모여든 오붓한 예술 공동체 멤버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예술가는 혼자 작업할지언정 혼자서는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서로 작업의 계기이고 라이벌이고 관람자다. 있어야 할 자리에 나가 하루치의 일을 하는 자들이 예술가다. 스스로 교수로서 학생을 가르치며 2, 3년에 한번씩 영화를 만들어온 켈리 라이카트 감독은 그렇게 예술 행위에 따라붙는 부르주아적 아우라와 신비를 걷어낸다.

 

 

현재 서울 리움미술관에서 볼 수 있는 피에르 위그의 <휴먼 마스크>(2014)는 ‘인류세’ 이후 세계를 상상하는 작품이 많아진 최근 영화의 흐름과 맞물려 시선을 붙든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버려진 식당에 소녀의 옷을 입고 가면을 쓴 채 방치된 원숭이는 훈련받은 서빙 행동을 목적 없이 반복한다. 인간과 동물, 연민과 소외, 연기와 주체성 사이에서 무한 진동하는 이 비디오는 ‘림보’ 그 자체다.

춘식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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